나는 걷고 뛸 때부터 아버지 조기 축구를 따라다니며 축구 좋아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축구 생각만 가득했다. 집에서 200m 거리에 광주광역시 하남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매일 축구화를 신고 학교를 갔고, 학교를 마치면 집에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던져놓고 축구공을 가지고 다시 운동장으로 갔다. 친구들과 축구하고, 학원에 가야 하는 친구들까지 붙잡아가며 축구를 했다. 그러다 계속 붙잡을 수 없어 혼자 운동장에 남아 공을 찼는데 시간이 지날 때마다 같이 공차는 사람이 바뀌었다. 중학생 형들, 고등학생 형들, 그리고 어른들 시간이 한참 지나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어머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여동생을 등에 업고서 "병준아~ 밥 먹으러 와라" 하며 데리러 오셨다. 어머니 등에 업혀 "병준아~ 밥 먹으러 와라~"를 매일 같이 외치던 동생이 지금도 나를 가끔 놀린다.
어느 날 매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어머니에게 여쭤본 적이 있다. 나 : "엄마는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매일 데리러 와요?" 어머니 : "매일 운동장에 있으니까 운동장에 없으면 뒷산 놀이터지."
초2 학년 때, 아버지 직장 때문에 전라남도 영광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도 축구와 달리기 실력은 1등이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학교 형들과 같은 팀을 이루어 옆 동네 학교 학생들과 친목으로 날짜를 잡고 모여 경기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우연히 간 옆 동네 학교에 축구부가 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 태어나 처음으로 축구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늘 장래희망으로 축구선수를 적고, 매일 공차기를 좋아했던 나는 축구부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축구부를 가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축구에 대한 욕심이 많이 커졌던 것 같다. 그전에는 그냥 즐기던 축구를 진짜 잘하기 위해서 목표가 생기고, 공놀이가 아닌 개인 연습이 되었다. 킥을 찰 때 땅을 안 차고 킥 하는 것부터 특정 선수의 차는 척 접는 동작, 슈팅 코스, 발리슛 등을 연습했다. 이동국 선수의 터닝슛과 최용수 선수의 골대를 두 번 맞추고 넣는 슛까지 똑같이 재현해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결국 친구들과 경기 중 재현한 적이 있다.
초 4학년, 3월 아버지가 주무시던 중 기도 막힘으로 인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리고 남은 우리 가족은 광주에 있는 큰아버지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이때 많이 내가 많이 엇나갔다.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학교에서 만화책만 보고, 하루 종일 게임하고, 친구들과 많이 싸우고, 어머니가 힘들게 일하시는 걸 알기에 용돈 달라고 하는 것도 미안하고, 가지고 싶고, 해보고 싶은 건 많아 훔쳐먹기도 하고, 게임 CD도 훔쳐보고.. 그러다 어머니에게 걸려서 엄청 혼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중 학교 반 대항 축구대회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체육 담당이었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월곡초등학교에 테스트를 보게 되었다. 합격을 했지만 합숙을 해야 하는 환경과 내가 엇나갈까 봐 걱정했던 어머니의 반대로 축구부를 들어가지 못했다.
초 5학년, 아버지가 필요한 현실과 맞물려 마음 좋으신 분과 재혼을 하시면서 경북 울진군 죽변면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 정리를 하시는 동안 전학 갈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서 또 공을 차고 왔다. 다음날 학교를 갔는데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친구들이랑 달리기 시합을 시켰는데 내가 1등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 "축구부에 들어오지 않을래?" 나 : "저 축구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세요?" 할아버지 : "어제 운동장에 공차러 왔지? 멀리서 지켜봤어. 내가 축구부 감독이야" 그래서 가정형편과 그동안 속 썩인 일 때문에 축구부에 못 들어갔던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원자력에서 지원을 받아서 돈을 안 내고, 합숙도 없고, 유니폼도 나온다는 얘기에 바로 다니겠다고 했다.
3일 뒤에 어머니가 저녁을 먹으면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어머니 : "요즘 애들이랑 공 차느라 늦게 들어오니?" 나 : "아 맞다. 엄마 나 축구부 들어갔어." 어머니 : "네가 어떻게?" 있었던 일을 설명드렸더니 잘 됐다며 그럼 다녀보라며 허락을 해주셨다.
포지션 이름을 '풀백, 스토퍼, 포워드, 윙' 몰랐던 나는 형들이 어느 포지션이냐고 묻는 질문에 가장 있어 보이는 '윙'을 골라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레프트 윙 포지션에서 뛰었다. 공을 던지며 하는 기본기 연습을 매일 같이 훈련한 덕분에 혼자서 공만 차던 나에게 부족했던 기본기가 많이 늘었다. 그리고 형들이 가진 장점들을 보고 똑같이 따라 하려 애썼다.
제대로 상대팀을 갖추고, 경기했던 건 3경기 뿐이었다. 6개월 뒤 나간 남해에서 열렸던 대교눈높이컵 축구 전국대회에서 우리 팀은 1무 2패로 예선 탈락을 했고, 나는 2골을 넣었다. 3골을 넣으면 휴대폰을 사주겠다고 한 부모님과 약속을 못 지켜서 속상해 있었는데 당시 2회 연속 우승 팀이었던 '안산화랑초'에서 스카웃을 받았다. 너무 기뻤지만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고, 당시 고속도로도 제대로 개통되지 않아 7~8시간 걸리는 걸 생각해 가지 않기로 했다. (인생 첫 번째 실수)
6학년,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 공격수 포지션에서 공을 보면서 침투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게 앞을 보고 침투하여 화가 난 감독님이 나를 수비수로 바꿨다. 물론 팀의 밸런스가 안 맞아서 수비수를 시키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수비 훈련도 정말 열심히 했다. 너무 열심히 한 탓에 고정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그냥 잘하기 위해 열심히 했다. 모래 바닥에서 슬라이딩 태클을 하면 엉덩이가 다 까지는데 다른 친구들은 한 번하고, 주저하는데 나는 피가 나는 상처 부위가 또 까져도 슬라이딩 태클을 했다. 골대에 들어가서 공을 걷어내는 연습을 할 때는 눈을 감거나 겁을 먹으면 엄청 혼이 났는데 나는 공과 싸운다는 생각을 하면서 눈 감으면 목숨 잃는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며 해냈다.
그리고, 5학년 때는 포철초에게 1:5로 졌지만 6학년 때 다시 만난 포철초를 상대로 0:2로 아쉽게 졌던 기억이 있다. 수비적으로 정말 많이 버티고, 골킥도 다 내가 찼다. 그러다 보니 허벅지 앞 근육이 찢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 지식이 없어 잘 치료하지 못해 성장통과 맞물려 2년 가까이 고생했다.
초등학교 졸업 전 체육특기생으로 울진 중학교에서 먼저 가서 훈련을 받았다. 새로운 전술 훈련과 강도 높은 체력 훈련에 욕을 하면서도 울면서도 웃으며 훈련받았다. 그리고,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실력이 늘 생각에 너무 좋아서 미쳐있었던 것 같다. 패턴 훈련을 하면 거기서 나는 남들과 똑같이 하지 않고, 동작을 바꿔가며 해보려고 했다. 패스 받는 것, 다음 터치, 접고 올리기, 땅볼 크로스, 높은 크로스 등등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계속 다르게 시도하며 훈련했다.
그런데 1살 많은 실력이 제일 좋았던 형이 매일 괴롭혔다. 초등학교 때는 나는 한 번도 괴롭히지 않고, 다른 친구만 유독 많이 괴롭힌 형이었는데 자유 시간도 빼앗고, 자기랑 놀자고 잡기 놀이를 할 때는 잡으면 때리고, 못 잡아도 때리고, 그만하고 싶다고 해도 때리고 내가 오목을 잘한다니 오목을 이겨도 때리고, 져도 때리고, 그만하고 싶다고 하면 "맞고 그만할래? 한 판 더 할래?" 자는 시간에도 마사지 시키고 계속 괴롭혔다.
그리고 훈련을 할 때는 드리블로 내가 제치면 공 내놓으라고 하고, 반대로 내가 뺏으면 뺏지 말라고 했다. 왜 그렇게 나만 괴롭혔는지 이유를 몰랐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3학년으로 올라가는 제일 잘하는 형이 전지훈련 동안 워밍업을 할 때마다 나를 불러 1:1로 같이 몸을 풀면서 나를 막아봐라, 뚫어봐라 했을 정도로 이뻐해 줬다.
그런데 하필이면 동계 전지훈련 기간에 1,2,3학년 한 명씩 한 방을 배정 받는데 운이 안 좋게도 그 형과 아무런 관심이 없는 3학년 형이랑 같은 방이 되었다. 괴롭힘은 이어졌고, 나는 30번이 넘으면 부모님에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틀이 되지 않아 30번이 넘어, 한 번 더 50번까지 참아보자 마음먹었지만 금방 넘었다. 그날 저녁 샤워를 하던 중 바가지를 얼굴에 덮고 들어가면 공기층이 생겨 숨을 쉴 수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신기해서 그 형에게 얘기했더니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형의 반응이 없어 물 밖으로 나왔는데 컵에 X을 싸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나왔는데 그걸 물 안으로 던졌다. 그러곤 나보고 치우라고 했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부모님에게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를 했고, 어떤 설득도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감독님과 축구부를 그만두겠다고 상담을 했는데 형이 괴롭힌 얘기 자체를 못했다. 감독님은 나에게 가정 형편 때문에 그러냐며 지원도 다 해주겠다고 하며, 졸업할 때 강릉상고로 진학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만두었다. 분명 그 감독님은 다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했다. 숙소에서 괴롭힐 때도 바로 옆 방이고, 지도자 눈에서 다 보일 텐데 방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얘기하면 혹시라도 나중에 그 형이 해코지를 할까 봐, 형들에게 집합되어 친구들까지 혼이 날까 겁나 말하지 못했다. 어떻게 지도자를 믿고 축구를 계속 할 수 있었을까..
어릴 적 꿈꾸던 축구 선수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좋아하는 축구를 포기하지 않고, 결국 축구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한 팀을 맡고 있는 지도자는 아니지만 어쨋든 레슨 코치라도 축구를 가르치는 지도자다. 이러한 아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 축구에 미련이 있고, 욕심이 있고, 인성까지 챙기려는 지도자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중학교 올라갈 무렵 그만두려는 선수들을 보면 애착이 많이 가고, 도움을 주고 싶다. 실제로 나의 얘기로 극복한 친구들도 꽤 있었다.
참 감사하다. |